이야기를 계속 읽게 만드는 문장과 단어들
콘텐츠가 쏟아지는 요즘에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최은영 작가의 작품을 접할 때마다 나는 위로를 받고, 자주 운다.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무조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내게 무해한 사람>은 최은영 작가 특유의 장치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편지와 마음에 대한 서술이 그것이다.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작품들을 볼 때 작가와 내가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느껴서 무척 재밌다.
"그날 우리는 롯데리아 빙수를 먹고 있었다. 창밖으로 포장이사 트럭이 지나갔고, 그걸 본 모래가 공무에게 물었다."(모래로 지은 집, 123쪽)
롯데리아 빙수와 포장이사라는 단어는 너무도 한국적이어서 재밌다.
최은영 작가의 문장들과 단어들은 이야기를 계속 읽게 만든다.
"여섯시. 마지막 햇빛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그 여름, 38쪽)
"문득 나는 어떤 부끄러움을, 얼굴이 온통 붉어지고 어깨까지 따끔거릴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모래로 지은 집, 119쪽)
빛, 마음, 창가, 빵 등 일상적인 단어들이 최은영 작가에 의해 아름다운 문장을 이룬다. 그 문장들에 플래그 표시를 할 때마다 살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최은영 작가는 어른이 된 삶에서 느끼는 감정의 변화에 대해 잘 이야기한다. 시작은 분명 어린 시절에 있는데, 어른의 삶에서 끝낼 수 없는 뭔가에 대해서 말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른의 삶이 남아있다. 어른들의 삶은 어른(이라고 규정지어진 20대)인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린 아이일 때 보다는 복잡하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지나가는 밤, 99쪽)
"그저 실망스러운 어른들의 실망스러운 행동일 뿐, 아니, 실망스럽지도 않은 불행한 인간들의 가학 취미일 뿐이었으니까." (모래로 지은 집, 111쪽)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 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
마음
"나의 선택으로 공무를 만났고, 일상을 나눴고, 내 마음이 무슨 물렁한 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씩 떼어 그애에게 전했으니 공무는 나의 일부를 지닌 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무와 떨어져 있는 나는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없었다."(모래로 지은 집, 131쪽)
"그 애를 껴안아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모래로 지은 집, 159쪽)
"반박하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피치 못할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자신들 삶의 모습을 또박또박 말하는 건 잔인한 짓이 될 테니. 그 시간들을 거치지 않은 인간으로서 그런 비판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을 테니까."(모래로 지은 집, 161쪽)
편지
"처음 쓸 땐 한 장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도 몰랐는데 쓰다보니 앞뒤로 세 장이나 썼네. 내가 혼자 잘 지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와 말하지 않고도 오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가 더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걸 알게 됐어. 빨리 만나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모래로 지은 집, 157쪽)
무해한 것과 무해하지 않은 것
미주의 마음에 진희가 무해한 사람이라는 안도가 퍼져나간 순간 이미 무해함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이었다.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수도 없을거야. 진희와 함께 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고백, 196쪽)
"나는 항상 네 편이야. 세상 모두가 널 떠나도 난 네 곁에 있을거야. 여자가 했던 말을 혜인은 오래 되뇌었다. 지키지도 못할 말을 왜 한거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는 말 한마디 하는게 그렇게 어려웠나. 나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나." (손길, 215쪽)
"어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부모를 좋아하는 마음처럼,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의 굳은 마음과 달라 자신의 부모를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못한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손길, 219쪽)
"어른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같이 증오할 사람 하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손길, 222쪽)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손길, 222쪽)
"슬퍼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덜 아플 거라고 어른들은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조용히 말해주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마음이라는게 그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손길,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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